Ep.12 베트남 여행의 하이라이트! 다낭을 향한 기차 여정|베트남|



철로 위에 새겨진 세월을 노래하던 기차. 쉼표 하나 없이 연주되는 드바쁘고 거친 선율에 예닐곱 번 뒤척이다, 졸음과 피곤의 다툼에 짓이겨 결국 깊은 잠에 들었다.

 


날이 밝아온 줄 모르고 아침을 달리하던 나. 달콤한 잠이 끝나지 않길 바랐지만, 눈치 없는 방광이 조여온다. 지금 깨면 다시 잠 들지 못할 것 같아 마음속으로 '오분만 더'를 외쳐보았다. 잠깐 평온을 찾던 중추신경이 점점 아랫배 주위로 집중된다. 주먹을 쥐고 발가락도 오므려 보지만, 소용없다. 

결국, 참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자리를 뱍차고 일어났다. 창백한 달빛이 흩뿌려져 있던 창가엔 누런 빛결이 꿈틀인다. 일곱시 정각을 가리키는 시곗바늘. 객실을 둘러보니 윗니를 포함한 나머지 승객들은 아직 아침의 부름을 듣지 못했는지 열차와 함께 격렬한 춤사위를 뽐내고 있었다. 그럴리 없겠지만 혹시나 깰까 싶어, 까치발을 한껏 치켜들어 화장실의 부름에 응하였다.



자는동안 달팽이관이 기차의 흔들림에 동기화 되었던 걸까? 탈선 할 기세로 휘청거리는 기체에 동요되지 않고 균형을 잘 잡는 몸뚱아리. 화장실에 도착해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철로가 훤히 보이는 구멍이 굉음을 뿜어내며 날 노려본다. 그 구멍을 과녁 삼아 남자의 자존심을 건 사격놀이를 마치고, 칫솔을 입에 물었다. 급한 불도 껐겠다, 상큼한 마음으로 치카치카를 하려는데 암모니아 향이 콧방맹이를 후려갈긴다. 조금 위험하지만, 악취를 피하고자 열차 문에 매달렸다. 풀내음이 그득한 바람이 좋다. 칫솔질하며 스쳐지나가는 마을들을 눈에 담기 위해, 눈 셔터를 바삐 놀려본다.

기차역 조차 없는 작은 시골 마을들이 깜박이듯,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기억 되길 원치 않는 건지 쏜살같이 달아나는 마을들. 놓치고 싶지않아 조금더 눈여겨 보았다.

누렇게 뜬 철로위에 정차한 열차. 시간도 잠시 정차해 있다 발목이 잡힌 것일까? 

닭, 강아지, 염소들이 종족을 뛰어넘은 술래잡기를 하고, 크기도 모양도 제멋대로인 집들은 서로간의 경계선도 두지 않았다. 길게 늘어진 빨래줄엔 새벽같이 부지런 했던 어머니들의 노고를 증명하듯 옷가지가 가지런히 널려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던. 그 옷들의 주인들은 어디있나 궁금해 하려던 찰나, 구멍가게 앞 플라스틱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주민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손에 거머쥔 커피 잔에 하품 한 점을 떨구다 눈 마주친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아주머니들. 나도 급하게 손을 흔들어 보지만 이미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다. 

몇 안되는 집들을 지나 논,밭이 이어진다. 구슬땀 흘리며 게으름 피우는 물소에게 매를 들어 보이는 농부에게 내가 먼저 손을 흔들어 보이자 농 모자 속에 감추었던 미소를 꺼내보이신다. 

너무나 짧은 찰나였지만, 초대도 없이 나타나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인 내 마음을 뜨겁게 달궈 놓은 만남이었다.



한참을 넋을 놓고 있다가 객실로 돌아오니 기차가 한뼘만한 작은 역에 멈춰 선다. 잠시 정차 하는 것인지 경적조차 없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 올 정도로 한적한 촌 동네. 플랫폼 위엔 하차나 승차하는 승객 대신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자란 민들레 꽃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이 어색한지 윗니의 어깨가 들썩인다. 잠시 뒤척이나 싶더니, 두 눈을 껌벅이며 자신이 깨어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침대에서 내가 사라진 걸 확인한 그녀는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고 발치에 서 있는 날 발견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다가가 물이 묻지 않은 손등으로 볼을 비벼주었더니 미소로 답변하는 그녀. 

"다 왔어?" 라는 그녀의 물음에 손목시계를 들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일어날지, 다시 잠들지 고민하는 그녀의 초조한 눈빛이 사랑스럽다. 다시 잠들수 있도록 토닥여 주었더니 금세 새근 거린다.  

오늘도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푹 잤으면 했지만, 정적이 익숙해질 즈음 다시금 뒤뚱이는 기차. 이번에는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랐는지 다시한번 잠에서 깬다. 잠이 도망 갔다며 울상을 짓는 그녀.

"얼마 못잤는데..." 

아쉬운 듯 입맛 다시는 윗니의 손을 이끌고 식당칸으로 향했다. 



식당칸은 열차 끄트머리에 달려 있었다. 비좁은 통로와 수동식 쇠을 통해 대여섯 개 되는 열차 칸을 건너가야 했다. 기차의 신들린 춤사위에 맞춰 한참을 뒤뚱 거리며 걸어, 제일 저렴한 좌석인 나무의자가 있는 열차 칸을 통과하자 비로소 식당칸이 나타났다. 

식당의 화려한(?) 비주얼에 압도되어 잠시 주춤였다. 오리엔탈리즘의 표본이 될법한 인테리어. 니스를 두껍게 덧칠한 목조 벽과, 모서리마다 칠이 벗겨진 식탁, 그 위에 누렇게 타들어 가는 백열전구. 바닥엔 오색 문양을 지닌 카펫이 깔려 있었고 좌석 쿠션은 빛이 바랜 빨간색이었다. 마치 옛날 중국 영화 세트장에 들어선 느낌이 들 정도다.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커피 한 잔을 주문하였다. 양동이 주전자에 담긴 커피를 종이보다 얇은 플라스틱 컵에 따라준다. 분명히 블랙 커피를 주문했지만, 진한 연유맛이다. 



공교롭게 직원들의 아침식사 시간과 겹쳤다. 제각각 다른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둘 씩 짝을 지어 나타났. 조식은 단일 메뉴인건지, 모두들 흰쌀죽을 한 그릇씩 받아 들었다. 고개를 그릇에 박은채 게눈 감추듯 비워낸다. 그렇게 순식간에 나타난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어진 식사시간이 짧은가 보다. 동남아 특유의 느릿한 행동은 여기서 찾아 볼 수 없었다.

잠시 후, 백인 여행객들이 식당 자리를 가득 메운다.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온 백인 아주머니는 이리저리 눈치를 흘리다 윗니와 내가 제일 만만해 보였는지 이면이 가득 담긴 인사를 건네왔다.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있던 윗니와 나. 윗니와 나란히 앉으며 아주머니에게 자리를 내어 드렸더니 남편으로 추정되는 백인 아저씨를 불러 앉혔다. 

어색한 기류가 잠시 흐르고,"어디서 왔니", "어디 가니", "어디가 좋았니" 등의 식상한 질문을 해 온다. 나름 성심성의 것 대답해 드렸지만, 형식적인 대화의 심지가 짧게 타들어갔는지 우리를 등지고선 다른 백인 여행객들과 잡담을 나눴다.


단일메뉴를 주문하니 다진고기와 송송 썰린 파가 고명으로 얹혀진 죽을 가져다. 단촐해 보였지만 맛있게 먹던 직원들의 모습이 떠올라 크게 한 수저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뜨거울까 싶어 혀를 굴려보지만, 목넘김에 적당한 온도다. 왠지 동남아에서 파는 죽은 향신료 향이 가득할 것 같았지만, 그냥 익숙한 죽 맛. 정말 무난하다 생각했지만, 고수가 들어있어 윗니에겐 또 한 번의 도전이었다. 



 

식사하는 내내 창 밖을 구경하다 보니 지형이 바뀌는걸 관찰 할 수 있었다. 아침내내 한적한 시골 마을들만 지나더니, 갑자기 광활한 평지가 나타난다. 카르스트 바위산들을 병풍삼아 논이 지평선 끝까지 놓여있다안개낀 카르스트 바위의 형상이 하늘을 담은 논과 어우러져 베트남 만의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쌀농사 짓는 건지 물이 대어져 있는 논. 기계화된 농업이 아닌, 오롯이 손과 허리로 일궈낸 농부의 일년이 꼬박 담겨있다. 이곳에서 재배한 쌀 맛이 꿀맛일거라 짐작해 본다.



밤에는 객실 내부가 너무 추워서 깊게 잠들지 못했다는 윗니. 열차가 햇빛으로 달궈진 틈을 타 쪽잠에 들었다. 너무 잘 자서 그런지 잠 생각이 없던 난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보며 오늘까지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위기의 상황도 있었고 손해 본 일도 있었지만, 무난하게 잘 대처한 것 같아 뿌듯하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9박10일간의 베트남 여행 일정을 짜면서 도시간의 이동에 대한 걱정이 정말 많았었는데, 꼼꼼하게 사전 조사를 해온게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비좁은 벙크베드 위에서 뒹굴다 몸이 뻐근해져 객실을 나섰다.



도착지인 다낭에 가까워지면서 시퍼런 바다가 나타났다. 바다를 따라 해안가를 달리던 기차는 바다와 경계선을 둔 바위산을 올라 더 넓은 시야를 선물해 주었다.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에 매료되어 복도 창문에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바닷바람을 느끼고 싶어 창문을 열어 제껴본다. 코끝이 살짝 시릴 정도로 찬 바람이었지만, 답답한 열차 안에 장시간 갇혀 있어서 그런지 가슴이 뻥 뚫릴만큼 시원하게 느껴진다.

한참을 감성에 젖어 있었더니 객실을 함께 쓴 백인 친구가 옆으로 다가온다,

"바다 멋지네! 서핑 하기에 적절해 보이는데?" 

"그래? 난 서핑은 몇 번 안해봐서."

긴 기차 여정에 말동무가 필요했던 건지 여행담을 늘어놓는 녀석. 혼자만의 시간이 좋았던 난 큰 호응이 없었고. 내 시큰둥한 반응에 머쓱해진 녀석은 옆 창가로 옮겨 가더니 금발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워 윗니를 흔들어 깨워본다. 졸음이 달아나지 않다던 윗니를 창가에 데려오니 금세 활기를 찾는다. 잠든 사이에 바뀌어 있는 절경을 보더니 감탄하는 그녀. 조금 전 내가 느꼈던 전율을 느낀 건지 그녀도 창가를 떠나지 못한다. 

다낭역에 도착하기까지 한시간 정도를 창문에 달라붙어 있었다. 기차 여정이 지루할 줄만 알았지만 이번 베트남 배낭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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