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순례길|Day0. 격리.수련.인정 그리고 비아리츠

5/31 -7/13 프랑스-스페인 순례자의 길[Camino de Santiago] 여행기 입니다.

 


 

처음 올렸던 글들을 조금 더 정리하고 다듬어 다시 올려 봅니다.

본문:https://www.bambitravels.com/45?category=196943

 


 

 

난 분명 통로자리를 예약했지만 탑승하고보니 창가자리.
히드로 공항을 벗어난 비행기는 눈 깜작할 새에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고도가 높아지고 귀가 먹먹해지면서 이젠 정말 집에서 멀어졌구나 하는 사실이 가슴을 압박해 왔다.
 
안전벨트 등이 꺼지고, 기내의 무겁던 공기는 설렘이 가득한 웅성거림으로 채워졌다. 여행을 앞 둔 승객들의 어깨 사이에 억지로 끼워진 채로, 난 창 밖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혼자여서가 아녔다. 내가 소외감을 느꼈던 이유는 이 여정의 끝에서 마주 할 내 자신이 지금보다 행복한 사람일거란 확신이 없어서였다.
 
느린 듯, 빠르게 지나치는 구름을 멍하니 보고 있자하니 머릿속은 걱정의 그림자 들로 그득해졌다. 그 형태와 크기가 제각각이었지만 궁극적으로 난 한 가지의 의문에 답하기 위해 순례길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처음엔, 지금의 나는 나쁘지 않다, 괜찮다란 어설픈 위로를 던져 놓고 진짜 그렇다고 믿어보려 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거짓말들을 장황하게 늘여 놓으며 나 자신을 설득하고 싶었다. 난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의미 없는 희망을 품어 보기 위해.

하지만, 마음속 깊었던 상처는 칼로 도려내어 버릴 수 없는, 이미 내 신체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억지로 도려내려 했지만, 상처는 더 커졌고, 비참한 내면과 마주하기 싫었던 난 내 마음속에 깊히 파놓은 동굴로 숨어들어갔다.
지금은 장난처럼 던질 수 있는 질문이지만, 지난 날 난 이 질문을 하루에도 수백 번 집어삼키며, 몇 날 며칠을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앉아 눈두덩이가 부어오를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처음엔 왜 이렇게 추상적인 질문을 던지며 내 자신을 괴롭힐까 하며 고민 하였지만. 그 무게에 지배 된 순간 난 손 발이 등 뒤로 묶인 채 철로 위에 던져진 포로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우울증에 걸린 것이 었다. 
그렇게 일년을 꼬박 방 안에 내 자신을 가둔 채 소리없는 아우성을 치던 난, 문득 병이라면 치료도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고 생각보다 거리낌없게 방을나서, 병원을 찾아갔다. 머리에 이것저것을 붙이며 바쁘게 돌아가던 기계들, 영화에서 보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검사실에 들어 간 난, 의사의 너무나 간단명료한 진료에 의구심을 품었지만,  우울증이란 단어가 검사 차트에 적혀진 순간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 내 아픔이 진짜였다고 인정해주는 첫 순간이었다.
다행이도 난 우울증을 극복해 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난 분명 이 지옥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을거라, 치료가 분명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고. 치료에 성실히 임하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치료법이라고 내놓은 의사의 방법은 진료와 같이 너무나 간단했다.

그건 바로 세가지 였다.

1)격리 2)수련 3)인정 
격리란 생각보다 쉽기도, 어렵기도 한 것이었다. 8년을 밤을 새 가며 10대부터 20대 중반까지 열정을 부었던 것에서 멀어진다는 것, 결과물이 눈 앞에 있지만 등 돌아 선다는 것은 내가 살면서 했던 선택 중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어려운 것이었다.  그게 내 세상에 전부였고, 유일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그리고 그 길이 나를 이렇게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면 포기하는게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짐을 정리하고, 부모님 집으로 향하던 300km가 조금 넘는 길이 그렇게 허무하고 짧을 수 없었다. 내 8년을 대변하기엔 너무나 순탄했고, 막힘 없었다.

부모님 집으로 돌아 온 난 곧바로 두번 째 단계를 수행하였다. 의사는 적절한 운동과, 올바른 식습관, 그리고 규칙적인 수면이 가장 도움 될 거라 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우울증에 시달리던 일년이란 시간동안 난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을 때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먹었고, 불면증이 심해 삼, 사일동안 단 일분도 잠들지 못하다가 기절 할 듯 이틀을 꼬박 잠으로 채웠고, 깨어 있는 지옥같은 시간동안은 방에서 그 무엇에도 집중을 못하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내가 한국인이었다면 군대라도 다녀왔겠지만, 온전히 내 의지 하나로 이 세가지를 모두 수행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우울증을 극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난 지난 일년간의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시간들을 보냈고, 그나마 치료에대한 의지가 있었던 난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순례길이라는 생소한 장소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5일만에 프랑스로 떠날 준비를 마쳤고, 난 비행기 안에 실려있었다. 8년만에 집에 나타나 그 어떤 대화도 거부하다 갑자기 프랑스로 떠나겠다는 날 아무 말 없이 보내주신 부모님의 마음이 어땠을 지 아직도 난 다 헤아릴 수 없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들이시다. 

그 누구보다 슬픔을 안고 여행하는 작가 변종모는 말했다. 여행은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익숙한 자신과 만나는 일이라고. 나도 그가 했듯이,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외로운 길 위에, 남몰래 슬쩍 익숙한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도망치고 싶었다. 혹여 누군가 주워 주인을 묻더라도, 난 내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거짓말 할 용기라도 얻고 싶었다. 그렇게 새로운 나로 살아가고 싶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여행광이 난 비행 공포증이있다. 착륙할때 세상을 다 가진 느낌.
 

부기장의 피곤 섞인 환영 방송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기체가 좌측으로 기울며 새하얀 구름 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익숙했던 세상의 벽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다. 태어나 단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낯선 세상과의 대면. 여행의 시작. 토네이도에 실려 오즈의 세계로 떠난 도로시처럼 눈을 감고, 새로운 세상과 마주해 본다.

 

구름을 뚫고 나온 창 밖 모습은 구름 위와 상반되었다. 흑백 필터라도 끼운 것마냥 빛을 잃은 비아릿츠.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검은 구름이 낮게 떠 있었다.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비아리츠(Biarritz)는 여행책자나, 흔한 여행영상에 잘 담겨지지 않는 도시지만, 비아리츠는 사실 문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다.

문학의 꽃이라 불리울 수 있는 낭만주의 시대의 바이런, 쉘리, 키츠의 사상을 이은 프랑스 작가 빅터 휴고가 극찬한 도시인 비아리츠. 그저 고래사냥의 본고장으로만 알려졌던 비아리츠를 휴고[각주:1]는 "넵툰이 내쉰 바다의 거친 속삭임과, 밝고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조화된, 완벽한 곳" 이라며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과 아쉬움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바램과는 달리 유럽 국왕들의 여름 휴양지로 거듭나며, "왕들의 해변" 이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세계 2차대전 이후엔 미국정부가, 유럽에 남기를 택한 군인들을 위한 교육시설을 건설하면서 미국문화와 유럽문화의 교류가 확대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유럽의 서핑 본고장[각주:2]이라고 불리울 만큼 유럽 여행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실록이 이렇다 저렇다 해도, 내겐 그저 듣도보도 못한 프랑스의 어느 작은 도시일 뿐이었다. 구름을 뚫고 내려와 랜딩하며 기체 옆으로 보이는 도시는 여느 유럽의 작은 바다마을과 다른점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바다를 향해 강줄기 처럼 질서없게 뻣어내린 길. 그 길을 따라 형성된 마을. 비아리츠다.

 

기내를 벗어나 비아리츠 공항에 발을 내딛고선 승객들에 떠밀려 자연스레 출국장에 줄을 섰다. 출국장은 보통 내국인과 외국인을 구분하지만, 얼마나 작은 도시인지 줄은 단 두개였다; 유럽여권 소유자, 그리고 유럽여권 소유자 줄. 눈치것 외국인들(미국인들)로 보이는 여행객들을 따라 오른쪽 줄에 섰다.

 

기억 저편에 봉인된 불어 단어를 끄집어 내어 나열해 본다. 봉쥬르는 안녕, 메르시 보쿱은 고마워... 입에 잘 붙지않는 단어들을 열댓번 연습해보며 순서를 기다리는데, 줄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내 순서가 오고, 두꺼운 유리벽 너머의 심사원에게 잇몸까지 들어내며 미소지어 보았다. 하지만 검사원은 눈도 마주쳐주지않고 구멍 사이로 손만 내밀어 여권을 달라는 듯 손짓을했다. 손에 꼭 쥐고있던 여권을 건네주니 입국도장을 시원하게 찍어준다. 자국민이 아닌 입국자에겐 추가 질문을 할 것 같아 도장찍힌 여권을 받아들고 긴장한 마음으로 서 있었더니 이번에는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한다.

 

"Merci",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선 배낭을 찾아~

 

수하물도 하이패스로 나왔는지 내 배낭은 컨베이어 벨트위에서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있었다. 단숨에 들어올려 등에 업었다. 8년동안 나와 함께한 녀석이다. 내 두 어깨를 한껏 끌어안은 배낭의 감촉과 무게가 너무나 익숙해 포근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준비없는 여행이 컨셉인 여행이지만, 공항에서 도심까지 어떻게 가는지, 비아릿츠에서 순례자길의 시작점인 생장 (Sain't Jean Pied de Port) 마을에 어떻게 가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부딪혀 보자는 마음으로 인포메이션 부스에가서 길을 물어보는데, 직원이 심히 귀찮아 한다...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 들었던 프랑스인들의 인격에 대한 비하발언들이 뇌리를 스쳤다. 순간 그들에 대한 선입견이 나의 경계심을 자극해온다.

 

'아...아닐거야...'

 

나막신처럼 붙임성있고 사근사근한 환영을 바란건 아니지만 그래도 공항이고 자기나라를 방문하는 한명의 손님인데... 계속되는 차가운 직원의 반응에 기가 죽어버렸다. 계속되는 질문에 점점 어두어지는 직원의 표정. 결국 비아릿츠 부근의 정보만 얻고 생장가는 방법은 내일 일어나서 고민해보기로 했다. 

 

 


 

 

공항밖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몸채만한 배낭을 메고 영혼이 나간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몇명 보였다. 표정이나 복장을 보아하니 나와 같은 신분이 다름없었다. 생장에서 쓰려고 아껴두었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본다,

 

"부엔 까미노"

 

경계심많고 근심많아 보이는 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나와 같은 신분인, '순례자'들이 모여 공항을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도 얼굴에 [심각함]을 장착하고선 지역안내 책자와 구글맵을 펼쳐보았다. 그들과 머리를 맞대어 보다가 잠깐 얻은 정보에 의하면 비아릿츠에서 생장으로 가는 직행은 없고, 근처의 바욘(Bayonne)이란 도시에서 기차나 버스로 생장까지 이동할 수 있단다.

 

오늘은 시간상, 그리고 체력상 더 이상의 이동은 무리라 판단되어 비아릿츠에서 일박을 한 뒤 내일 아침 일찍 바욘으로 이동하고, 바욘에서 생장까지 가는 버스편을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순례자 무리중 다행이도 나처럼 무뇌, 무계획을 실천하는 폴란드 순례자 두명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들도 더 이상의 이동은 힘들거 같다며 셋이서 같이 비아릿츠 도심으로 이동하여 저렴한 숙소를 찾아보는게 어떻냐고 선뜻 제의해 왔다. 호스텔 유형상 쓰리베드룸이 싸게 먹히는걸 아는 난 무조건 오케이를 외쳤다. (어쩌면 그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지도...)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버스기사 아저씨의 등떠밀림에 비아릿츠 기차역 앞에서 내렸다. 그도 우리의 초조한 표정을 읽었는지 유스호스텔이 근방에 내려준 것이었다. 버스 아저씨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다보니 유스호스텔 표지판이 보였다.

 

기차역에서 빠져나와 샛길을 따라 10분정도 도보로 이동하며 폴란드 커플과 통성명을 나누었다.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온 그들은 3년전 카미노를 같이 걸었던 계기로 연인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단다. 신기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언급했던 카미노 커플을 만나게 되다니. 끝없는 질문과 대답이 오갔지만 미쉬와 모니카는 자신들이 카미노에 다시 오르게 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너도 걷다보면 알게 될 거라며.

 

 

여행에 대한 얘기로 인해 우린 같은 종족임을 다시한번 확인 할 수 있었다. 도전심 강하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진 않되 최선의 해결책과 방안을 고안해 낼 수 있는 순발력이 있는 진정한 여행자들, 바로 배낭여행족이었다.

 

그들은 나무 그늘은 지붕이며, 마른땅은 시몬스 침대라며 순례길을 걸으며 알베르게에서 지내지 않고 캠핑도 할거라며, 사용할 텐트도 짊어지고 왔단다. 그들의 패기에 압도되어 대단하다는 말과 함께 엄지척을 표했다. 내 칭찬에 부끄러워하던 미쉬는 폴란드, 한국은 둘 다 치열한 전쟁을 살아남은 생존국가라며 후손인 우리도 모두 강한 사람이란다. 우린 도원결의를 맺고선 쓸데없는 의지를 불태웠다.

 

 

한적한 호수가에 위치한 유스호스텔에 들어가니 익숙한 어둑함과, 빨래가 덜 마른 냄새로 가득했다. (유스 호스텔들은 대부분 조명이 밝지 않아, 어둑어둑하고 물빨래를 하는 여행객들 때문에 퀘퀘한 냄새로 진동한다. 경험상 이런 척박한 환경은 유럽 유스호스텔이 유난히 심한것 같다.)

 

카운터에 앉아있는 직원에게 가격문의를 해보니 1박에 한명당 26유로란다. 너무 말도 안되는 가격이었다. 이렇게 외진곳에 있는 유스호스텔의 도미토리 방이 1박에 26유로라니. 내가 19살이던 8년전만해도 10유로면 유럽의 어느 호스텔이나 웰컴이었는데... 시대가 변한게 확실하다. 가격을 확인한 우린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야외취침을 결정했다.

 

 

오늘 밤에 있을 엄청난 재앙을 예측한지 못한채 우리 카미노의 시작은 롸잇나우라며 싱글벙글이었다. 조금은 무모하지만 셋이라면 안전할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유스호스텔 건물 주변에도 비박을 할만한 곳이 충분히 있었지만 규정상 절대 안된다는 직원의 단호함에 부근에 있는 호숫가 공원을 기점으로 비박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극심한 피곤함에 어디서든 잘 수 있을거라며 호언장담을 했지만, 혹시나 공원을 관리하는 공무원에게 쫒겨날것을 대비해 호수를 따라 공원을 반바퀴정도 돌았다. 한참을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아 공원 트레일을 벗어나 나무가 무성한 숲 속으로 들어가보았다. 더 이상 들어가면 길을 잃겠다고 생각이 든 순간 바닥이 완만한 곳이 보여 멈춰섰다.

뒤따라오던 폴란드 커플의 동의도 없이 배낭을 던져버리고 멈춰선 곳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아 버렸다. 폴란드 커플도 지쳤는지 옆에 다가와 철푸덕 앉는다. 셋이서 한참동안 말없이 넋을 놓고 앉이 있다, "이정도면 되지 않을까?" 라는 나의 물음에 그들도 씁슬한 미소와 함께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미노를 걸으며 비박할 것을 계획해서 단디 준비해온 그들과 달리 난 타프도 텐트도 없었다. 가방에 굴러다니던 비닐봉지 몇장 (챙기지 않겠다는 것을 혹시 모른다며 배낭에 넣어주신 아버지, 그는 정말 빛)을 바닥재 삼아 침낭을 그 위에 조심스레 깔고 누웠다. 방수가 되지 않는 침낭이라 새벽에 내릴 서리가 걱정 되었지만, 전쟁이 나도 잘 수 있을것 같은 피곤함이 이미 온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기내에서 먹었던 반토막난 샌드위치를 제외하곤 하루종일 먹은게 없던 우린 카미노에서 먹으려고 챙겨왔던 비상식량을 꺼내와 공유한 후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에어 메트리스가 없어 등 전체로 나무숲의 거친 마사지를 받아야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는 나와달리 금새 새근새근 잠에든 미쉬와 모니카.

 

눈만 감으면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잠자리가 불편해서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결국 새벽 세시까지 눈만 감고 누워있다가 핸드폰을 꺼내들고 메모장에 글을 끄적여 보았다,

 

새벽 세시, 비아릿츠 작은 공원의 어느 숲길.

 

감각과 감정이 풍년인 밤이다. 잠에 들려고 노력해 보지만 자꾸만 등에 베기는 나뭇가지와 돌, 저 만치서 들려오는 여우의 흐느낌, 바람에 휘날려 울어대는 나뭇잎, 그리고 날 괴롭혀 왔던 수많은 생각들과 감정들이 뒤섞여 내 오감이 그들에게 충실할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아프자'라며 강해지기 위해 떠난다는 나의 다짐이, 현실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기력했는지... 길 위에서 도대체 어떤 해답을 찾으려 한걸까?

 

 

 

어둠이 허락한 고요함 속에서 깊은 생각에 발목이 잡혀있는데 불길한 소리가 들려온다. 잔잔한 바람이 흔들던 잎사귀의 소리와 달리, 조금 격한 바람의 울림이었다.

 

'뚝 뚝 뚝'

 

엎친데 덮친격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잠을 다 잤다며 자포자기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마침 세안도 하지 못했던 얼굴을 적셔주는 빗방울을 반갑게 맞이해본다.

 

그렇게 한참을 어둠속에 앉아 빗방울을 떨어뜨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상했다. 잠들기 전에는 분명히 숲속의 으슥함이 두려웠다.

 

칠흑같이 어두운 숲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빠지직! 쿵!"

 

"헉 뜨억!!"

 

내가 누워있던 자리에서 두보도 되지않는 거리에 집채만한 나무가 쓰러졌다.

 

벌떡 일어나서 앉아있는 것 조차 포기해야했다.

 

압사 당한뻔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한적한 프랑스 마을 비아릿츠의 숲에서 잠들었다 비명조차 못지르고 조상을 방문 할 뻔했다.

 

나무가 쓰러진 반대편에 자리잡고 있었던 폴란드 커플은 정말 깊은 잠에 빠졌는지 주위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체 여전히 꿈나라였다.

 

폴란드가 아무리 혹독한 전쟁을 치뤘다 하지만... 전쟁국가의 후손인 미쉬와 모니카는 정말 전쟁같은 일이 일어나도 잠을 자고 있었다.

 

 

  1. I have not met in the world any place more pleasant and perfect than Biarritz. I have never seen the old Neptune throwing joy and glory with such a force in the old Cybele. All this coast is full of humming. Gascony's sea grinds, scratches, and stretches on the reefs its never ending whisper. Friendly population and white cheerful houses, large dunes, fine sand, great caves and proud sea, Biarritz is amazing. My only fear is Biarritz becoming fashionable. Whether this happens, the wild village, rural and still honest Biarritz, will be money-hungry. Biarritz will put poplars in the hills, railings in the dunes, kiosks in the rocks, seats in the caves, trousers worn on tourists [본문으로]
  2. https://kr.france.fr/ko/news/article/385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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