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EP.3.1 Artem, Philosophia, Bel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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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시아|EP.3.1 Artem, Philosophia, Bellum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실 난 아직 내가 역사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 내가 여행을 하는데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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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정말 지루하고,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백년, 천년,그리고 때론 몇 천년을 거슬러 올라간 이야기를 머리에 욱여넣으며 여행 중에 보고 겪고 느끼는 것들에 의미부여를 한다는건 말이다. 하지만 겪어 본 사람만 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20대 때 했던 수많은 여행에서 느꼈던 공허함과 무미건조함이란.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도착한 곳에서 보이는 거라곤 건물과, 사람, 산과 강 밖에 없을 때, '난 지금 왜 이렇게 먼 곳에 와서 갖은고생을 다 하며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는지' 그 의문점에 지배되었었다. 역사에 관심이 없을 때 그랬다.

이제는 즐거운 숙제 또는, 여행의 일부라며 위안을 삼고 어쩌면 여행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공부하고 있다. 

이번 여행도 예외는 아니였다.

카플란의 'Balkan Ghosts'는 몇번을 읽어도 새롭다. 정말 경이로운 작가다.

발칸국가들을 여행하며 소개받았던 카플란과 웨스트의 책을 또 다시 펼쳐보았고 그레코와 오토만에서 그치지 않고 크레테, 에올리안, 아나톨리안, 트라키아, 아케메네스의 역사까지 들추어보며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서 고생을 꽤나 했다. 하나의 민족이라 여겼던 그리스는 생각보다 분열이 심했고, 지배적인 세력에 의해 그려졌다고 생각한 경계선 들은 흐릿하다 못해 점선으로 지도에 표기된 곳도 많았다. 무엇보다 에스테틱과 정교의 집결지라 생각했던 곳은 전설에 불과했다고 생각했던 불가리아의 Serdica, 현재 소피아였다. 그리하여 이번 여행에 부여하게 된 테마(theme)는 Artem Philosophia Bellum 이 세가지였다.

 

Artem Philosphia Bellum

Art, 예술, Philosophia, 철학, Bellum, 전쟁

순서로 보았을 때 우리의 여행 출발지인 그리스가 철학이 되어야 하는게 맞겠지만, 특정한 지역에 부여된 테마라 생각 지 않고, 적절 한 순간 적절 한 시각으로 기억에 담아보기로. 

 

잠에 들기 전 사전예약을 통해 취득한 아크로폴리스 입장표를 재차 확인하고선, 설레는 발걸음을 앞세웠다. 아직 잠에서 덜 깨었는지 무거운 몸. 아침이 짙게 내려앉은 아테네의 빛 가득한 골목을 가로질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최근들어 트립어드바이저에서 꾸준한 활동을 하며 한국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내가 방문하게 될 여행지에대한 정보를 얻기도 하다가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폭염이 기승인 최근엔 레드크로스의 권고사항을 받아들여 아크로폴리스 방문에 제한을 두었다고 한다.

현지 언론에 의하면,

1.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은 오전시간에만 방문가능

2. 사전예약을 하지 않으면, 줄만 서있다가 컷오프가 당할 수 있다

가 그 두가지 였다. 

뉴욕에 단 하루 있으면서 사전에 브로드웨이쇼도 예약하지 않는(그래도 제일 앞 자리에 앉아 James Franco와 악수도 나누었다) 나의 P적인 여행 서타일, 그리고 '여행은 즉흥' 이라는 쓸데없는 고집<신념>을 이어오던 나에겐 여간의 자존심 스크래치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여행을 하며 했던 다수의 타협이 좋은 결과에 도래하였다. 시기적인( 포스트 코로나) 거라며 변명을 해보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닌 둘의 여행을 해야하고; 전에도 언급하였지만 (돈은 아직도 없지만) 시간이 없는 30대에 접어들며 '즉흥'에 딱 달라붙어있는 '책임'을 감당하기가 조금 벅차다.

 

사전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장하기까지 약 한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엄청난 인파와, 입구도 보이지않는 지점까지 늘어진 줄을 보며 걱정을 하였지만, 입구가 개폐되고 직원들의 빠른 손놀림에 그 많던 줄이 순식간에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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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여담이 있는데. 이른 아침부터 너무나 길게 늘어진 줄에 이상함을 느꼈던 난 그새를 참지 못하고 줄에서 이탈했다가 큰 낭패를 볼 상황이 되었는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줄을 이탈하기 전 우리 뒤에 서 있던 정말 잘생긴(객관적으로 남성잡지에서 보았을 법한) 아저씨와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줬다. 하마터면 줄 맨 뒤로 갈뻔했다..(윗니 미안) 감사를 표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저씨에게 표는 구매했냐고 물어보았더니 우리 줄이 매표소 줄이 아니냐며 되물어 왔다. 줄을 이탈하며 알아봤던 바에 의하면, 우리가 서 있던 줄은(남서) 사전예약을 했던 입장권 소지자를 위한 줄이었고 매표소 줄은 서쪽으로 형성되어있다는 정보를 전달하자 아저씨는 급하게 매표소로 향했다. 결국 매표소 줄이 더 길다는 사실을 알게된 아저씨는 우리가 입장하기 전까지 맡아준 자리에 합류하지 못하였다... (뭔가, 감사하면서도 미안했는데, 그래도 미리 알려줘서 아저씨도 더 큰 손해를 면하지 않았냐며 달래는 윗니의 말에 아쉬움을 달랬다).

다들 격양된 얼굴로 셔터를 놀리며 인파에 파묻혀 전진하기 바빴다. 반면에 윗니는 잠시 서서 눈 앞에 놓여진 모든 것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며 한 동안 헤로데스 아티쿠스 앞에 서 있었다.

바삐 움직이는 일상에 자신과 맞지 않는 페이스에 실려 이리저리 치이며 끌려다녔던 지난 날들. 

코로나 백신 투약 이후 갑자기 얻은 병 때문에 수술도 수차례 치루고, 한국에서 조금 더 나은 경제활동을 위해 학교로 돌아간 남편을 대신해 가정의 뒷받침 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윗니에게 난 항상 감사하고 미안했었다. 

환경에 의한 변화는 어쩌면 당연하였다. 고난에 수 차례 베인 수줍은 소녀는 표정을 잃어버린 송장처럼 한 숨 가득한 시간들을 보내왔고, 그런 모습에 당황하였던 난 예전 모습으로 돌아와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강요하며 윗니를 더 힘들게 하였다. 핏기 없는 모습으로 여행만 손꼽아 오던 윗니는 그리스에 도착한 순간 빠르게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웃음기 많고 홍조를 띈 얼굴을 수줍게 비추던 카미노의 윗니가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나은 시간에 놓인 윗니는 5년 전 내가 기억하던 소녀의 모습으로.

다행이다.

1975년 부터 28년간 이어진 복구작업. 공식발표에 의하면 앞으로 20년 그리고 £47m를 더 필요로 한다는 말에 "아직도 저러고 있네" 라는 말이 자동스레 나왔지만, 본래 건축기간이 50년이 걸렸던 만큼 도합 100년(건축, 복구)이 갖는 의미도 굉장히 클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4세기부터 굳건하게 그리스의 상징물로 자리를 지켜온 만큼, 후세대에게 조금 더 원형의 모습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파괴" 와 "낭비"와 같은 레이블링으로 기억 될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최소의 도리가 아닐까. 시리아와 이란, 그리고 현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서 파괴 되고 있는 문화재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세계를 두 눈으로, 두 발로 걸어 보는것이 인생의 목표인 나로써는 남미의 경제붕괴와 콜드워의 재발, 아랍의 양극화 및 서구와의 대립 때문에 여행 금지구역이 나날이 확장되는 마당에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문화재를 보존하는 나라도 있음에 감사하다. 

이미 갔던 곳을 다시가는 것을 끔직히도 싫어하는 걸 아는 윗니는 본인 때문에 그리스에 다시 오게되어 미안하다며 비행기에서도, 어제 저녁 아크로폴리스 앞에서도 거듭 사과했었다.

하지만, 내게도 그리스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거늘,

놀랍게도 2009년 7월
놀랍지 않게도 2023년 7월

바로 첫 배낭여행, 그리고 첫 여행지였던 이곳에서 14년만에 같은 사진을 찍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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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아크로폴리스에 와서 지쳐있는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서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스미마셍, 와따시와 니혼진데스... 상황을 설명 드리자 흔쾌히 수락해주신 아이의 아버지에게 고개숙여 감사를 표 했다. 아 근데 더 미안한 건 사진찍고 일어나서 벤치를 돌려주려는 데 다른 사람들이 앉더라..

 

나만의 작은 미션을 수행하고선 뿌듯한 마음으로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아크로폴리스 유적지를 나가기 위해 서쪽에 위치한 프로필라이아 (현대어로 '포탈', 우리가 공상영화나 게임에서 흔히 접하는 그 포탈의 어원이 맞다.) 로 향했다. 

들어올 때 만큼 여전히 많은 인파가 일렬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개념없는 여행객들까지 합세해 행렬이 자주 멈추곤 하였다. 여기에서도 재밌는 여담이 있는데.

그런 그들을 향해 끈임없이 일침을 가하던 현지 가이드들은 "유적지를 오르지 마세요", "거기 앉지 마세요" 등의 주문을 하였다. 내 앞에 서 있던 여성은 셀카를 찍는다고 한참을 서 있었는데, 보다못한 젊은 현지 가이드가 그 모습을 보고선 "길막하지 마세요"를 서너번 외쳤다. 마지못해 자리를 옮기는 여성과, 통쾌하다며 동조하는 관광객들을 향해 가이드는 외쳤다 "This is Philosophy" '이게 철학이다'. 

한국에서 고귀하신 분들과 어깨 맞대어 살아가며 느꼈던 불편과 분노를 향해 나도 저렇게 멋있게 일침하고 싶다. 철학이란 인간사회에서 필요한 윤리적 행동강령이 사실 철학의 시발점이었고, 서구 철학의 창시자인 소크라테스도 윤리(Ethic)와 도덕(Moral)을 기반으로 그의 사상을 펼쳤다.  

조금만 서로를 배려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텐데... 
눈치 좀 챙기자.

 

12월에 있을 크리스마스 파티 때 만들 그리스 요리에 필요한 향신료 구매도 하고
항상 새로운 식재료에 관심이 많아 현지 시장도 둘러보았다.

아테네에는 현재(2023년) 80개가 넘는 박물관이 있는 만큼, 여행객에게 주어지는 옵션도 그만큼 많다. 박물관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2009년도에 방문했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어, 바쁜 일정에도 여기 만큼은 가봐야 한다며 윗니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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