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ino de Santiago|| D13. Ep.29 '우리'의 카미노


밤비



Camino de Santiago
Day Thirteen
Episode Twenty Nine
2 0 1 6. 0 6. 1 5


Our Camino




새벽 5시. 이제는 정말 일상이라도 되어버린 듯 저절로 눈이 떠진다.


화장실로 곧장 향한다. 어제 너무 잘 먹었던 건지 오랜만에 아주 긴 시간 동안 변기에 앉아 배변 타임을 즐겼다.


침대로 돌아와 세면도구를 챙기려는데 윗니도 방금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모습으로 세안 도구를 챙기고 있었다.


남여 공용 화장실 안. 윗니와 둘이 세면대 앞에 나란히 서서 이 닦기에 돌입한다.


교정을 하고 난 뒤로부터, 종교적으로 이를 열심히 닦는 나.


그에 못지않게 열심히 닦는 윗니.


태어나서 나처럼 이를 열심히 닦는 사람은 처음 본다.


윗니를 보고 있자 하면 초등학교 도덕책에 나왔던 영희가 떠오른다.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사회의 표본이 되는 그런 사람이랄까?


부모님의 엄격한 교육이 있었다는 그녀. 우리 세대와는 맞지 않게 부모님께 존댓말을 하는 걸 보고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된다.


칫솔로 변기라도 닦는 거 마냥 이를 열심히 닦는 소리에 다른 순례객들도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장실과 침실이 단지 유리 벽 하나로 나뉘어저 있어서 화장실 소리가 침실에서 리얼하게 다 들렸다).


어쩌면 민폐일 수도 있는 우리의 부지런함...


사실 지난 며칠간 알베르게에서 윗니와 내가 항상 제일 먼저 일어나 준비하는 탓에 아침잠을 택하는 순례자들에겐 악마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도 윗니와 나는 잘 때 송장처럼 조용히 자니까 잠잘 때만큼은 모범적이다.


(반대로 잠귀가 밖은 윗니와 나는 코골이들 때문에 밤마다 밤잠을 설친다)




국악 코골이의 주범인 발렌타인이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연신 해 댄다.


"잘 잤어? 몸은 괜찮아?"


어제 혼자서 술을 끊임없이 들이켜길래 걱정이 되었는데, 역시나 발렌타인은 강했다.


"개운해요"



준비를 마치고 서둘러 알베르게를 나섰다.


행동이 빠릿빠릿한 윗니와 둘이서만 준비를 했더니 금방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알베르게 앞까지 마중나온 발렌타인과 악수한번, 그리고 포옹 한번을 하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조심히 가. 버스탈때 짐 잘 챙기고"


"네 형. 누나 잘 부탁 드려요"


"응 그래 걱정마 산티아고까지 잘 모실께"


환하게 웃어보이는 발렌타인을 등지고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부턴 돌아보지 않을거다.


그가 나타나지 않을걸 알기에...



새벽의 푸른 빛이 감도는 부르고스의 도심을 가로지른다.


어제 낮에 보았던 새하얀 부르고스 성당의 자태와 달리, 시퍼런 그림자가 드리워져 그로테스크하다.


악귀를 쫒으며 성당을 지킨다는 가고일의 흉상이 무섭게 느껴진다.


차가운 새벽 바람을 가로지르며 많은 고민과,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 채워 졌다.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설렘과, 어젯밤 윗니에게 했던 약속의 책임감, 그리고 패밀리에 대한 미안함.


어쩌면, 벨로라도에서 버스를 탄다는 패밀리의 결정에 수긍 했더라면 아직 그들과 함께하고 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괜찮아?"


매일같이 발렌타인과 떠들고 웃던내가 말이없자 윗니는 걱정이 되나보다.


"응 괜찮아! 윗니야... 우리 둘이서도 재밌게 다니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정적이 흐르는 골목길을 가로지르며 서로의 숨소리로만 마음의 허전함을 달래고있었다.


고개를 돌려 윗니를 힐끗 보려다가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두근댄다.


어색했는지 말을 걸어오는 그녀, 그런 그녀의 말은 들리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 내 시선을 인식했는지 발걸음을 멈춰선 그녀.


순간 나도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아버렸다.


흠칫 놀란듯한 그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굳게 닫아 버리더니 잠시 경직 되었던 손에 힘을 푸는게 느껴졌다.


더 꼬옥 잡아본다.


"따듯하다..." 나도 모르게 내뱉어버린 내 속마음.


수줍게 웃더니 동요하는 그녀, "응...따듯하네"


멈춰있던 발을 떼 본다. 그녀가 따라온다.


처음에는 내 손에 이끌려 오는듯한 느낌이었다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보니 금세 그녀가 내 발걸음에 맞추게 되었다.


맞잡은 손에서 알수없는 안정감과 힘을 느껴진다.


글쟁이인 나의 인위적이고 진부한 말들로 미화되지 않은, 정말 아름다운 아침이다.




부르고스 마을을 벗어나 한적한 흙길을 걷는다.


아직도 우리의 손은 하나가 된것처럼 맞잡고 있다.


찌릿찌릿하고 설레이는 분위기를 깨고, 아침부터 어둑하던 하늘이 기어코 비를 뿌려댄다.


걱정이 되지만, 콧등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촉감이 썩 나쁘지 않다.


서둘러서 우비를 챙겨입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윗니가 허기지고 어지럽단다.


아무래도 공복에 걸으려니 힘들만 하다.


원래부터 아침을 먹지않는 나와 달리 직장생활을 하고 온 윗니는 아무래도 뱃심이 필요할텐데, 어제부터 리드하게 된 나의 실수였다.


"잠시만 기다려봐!"


배낭을 뒤져 비상식량 가방을 꺼내 들었다.


"미숫가루 마실래?"


배낭여행할때 항상 챙겨다니는 미숫가루를 꺼내들어 보인다.


"아껴야 하는거 아니야?" 라고 말하지만, 시선이 미숫가루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귀엽다.


"잠시만 기다려봐."


들고다니던 물병에 미숫가루를 타서 그녀에게 건넸더니 게눈감추듯 잘 마신다.


'가져오길 참 잘했다' 그리고 라라소아냐에서 출발하기전 수건과 미숫가루중  수건을 쿨하게 버린게 감사하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배낭을 내려놓고 웃옷을 벗었다 입었다를 반복하는게 곤욕스러웠지만


걸을때만 되면 자연스레 윗니의 손을 잡고 걸었다.


진통제를 먹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아파오던 무릎도 멀쩡하고,


심지어 배낭의 무게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근래에 매일 힘들어하던 윗니도 씩씩하게 잘 걷는걸 보니 그녀도 나와같이 말로 설명할수없는 어떤 원동력을 얻은듯하다.





비가 그칠 즈음 타르다호스 ("Tardajos")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했다.


식당 앞에 앉아 아침을 먹고 있던 이탈리아 커플이 우릴 반갑게 맞이해 준다.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우릴 흐뭇하게 바라보는 그들.


그들도 사실 카미노에서 눈이 맞아 '카미노커플'이 된 순례객들이다.


아침 인사를 나누고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술 가게 임이 분명하지만, 바 카운터에는 딱 봐도 가정식임이 분명한 음식들이 배열되어 있었다.


스페인에 와서 입맛들인 생과일 오렌지 주스 두잔을 시키고


스페인 스타일 오믈렛과 노른자를 터뜨려 먹도록 토스트 중간에 동그란 구멍을 낸 샌드위치를 시켜서


여유로운 아침 식사를 즐기기로 한다.


아침을 먹으며 윗니에게 조금 진지한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윗니]야 나는 사실 제멋대로라서. 둘이서 같이 있다 보면 너가 불편 할 수도 있어."


이해 못 하겠다는 그녀.


"난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즉흥적이여서. 계획도 없고, 목적도 없는 자율적인 걸 좋아하거든... 그런 나한테 맞추려고 하면 너가 지칠 수도 있다고 생각해"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채고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난 누구한테 이끌려 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우리 둘이 있으면 자연스레 내가 리드하게 될거같아. 혹시라도 나랑 있을 때 불편한 점이나, 너가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줘야 해."


알겠다는 그녀. 그래도 아직 불안하다.


어쩌면 당연한 말들이었겠지만, 예전에도 마음이 맞다고 생각한 동행과 불합이 있었기에 윗니와는 조금더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절대적으로 한마음 일 수 없기에, 맞지 않는 부분은 바로바로 공유하고 맞춰나가야 나중에 마음에 쌓아두는 게 없기에...


하루에 24시간동안 같이 있는 카미노에선 더욱더.




다시금 길 위에 올랐다.


마을 변두리에 멋들어진 카미노 전도가 있길래 사진에 담아두는데,


가만히 보니 부르고스가 프랑스 루트의 중간지점으로 표식이 되어있다.


부르고스는 사실 2/5 정도 되는 지점이지만, 왠지 기분은 좋다.




오늘은 부르고스에서 혼타나스까지 30km를 걸어야 하는 긴 일정이다.


순례자들에게 흔히 메세타("Meset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지형'인데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의 길이 포함된다고 한다.


그늘이 없고 탁 트인 벌판이라 더운날엔 죽음의 길이 된다고도 불리우는 구간이라,


시간이 없는 순례자나, 완주가 목표가 아닌 순례자들이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영어와 스페인어가 되니까 길 다니면서 주워듣는 게 많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스페인에서 워낙 많은 지형과 지역 이름들이 난무하길래 정리가 조금 필요했다.




다행이도(?) 비가와서 날씨가 선선하다.


호니요스("Hornillos") 마을까지 가는길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꾸준한 속도로 걸을수 있었다.


마을이 보이는 언덕위에서 슌("Shun") 이라는 일본 순례객과 처음으로 통성명을 나누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그는 매일 혼자 다니면서도 싱글벙글이다.


토레스 델 리오에서 처음 인사했을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미소를 짓고 다닌다. 윗니와 닮은구석이 조금 있다.


자신은 호니요스에서 오늘 스탑할거라며 볼 수 있으면 또 보잔다.





마을에 도착과 동시에 다시 비가 오기 시작한다.


마을의 규모가 상당히 작아서 마땅히 앉아서 쉴만한 곳도 없어 보인다.


결국 마을 초입에 있는 구멍가게 앞 시멘트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쉬기로 한다.


쉬는 김에 윗니의 발 상태를 확인하기로 한다.


어느새 자연스레 그녀의 주치의가 되었다.


매일같이 물집 상태며 발 상태를 확인 뒤 치료를 해주고있다.


시간이 나면 마사지도 병행하며 그녀의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도록 노력해 본다.


그녀가 잘 걸어야, 동행하는 나도 그날의 일정을 조금 더 수월하게 소화할 수 있다.



다시 출발하려는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장맛비처럼 퍼부어대는 비를 뚫고서 마을을 빠져나왔다.


작은 언덕을 오르는데 갑자기 비가 멈춘다.


너무 급작스레 멈춰서 뭔가 이상하다 싶어 뒤를 돌아보니 호니요스 마을에는 아직 장대 같은 빗물이 마구 쏟아지고 있다.


"저 마을에서 보면, 마치 혼타나스까지 비가 오는 걸로 보일 텐데... 오늘 호니요스에서 멈추는 사람들 많겠다"


대꾸가 없자 윗니를 바라보니


그저 서로 맞잡은 우리의 손만 주시하며 미소를 짓고 있다.






모든 게 낭만적이다.


홀로 우뚝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도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자제할 수 없는 감정이 자꾸 분출되어 길 위에 흘러 넘친다.





언덕을 넘어 지평선까지 곧게 뻗어있는 카미노 길이 나왔다.


우리의 앞에도, 그리고 뒤에도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오롯이 윗니와 나, 단둘이만 카미노 길 위에 놓여 있었다.


풍경이 너무 예뻐서 사진에 담고 있는데 구름이 걷히더니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맑아졋다.




혼자 걸었어도 이렇게 아름답게 보였을까?


마치 새로운 길을 걷는것 같았다.


고통의 길이아닌


우리의 카미노는


가슴뛰는 설렘과, 열정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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